▲ 연극 '단테의 신곡'의 지현준(단테 역)과 정동환(베르길리우스 역).
[플레이뉴스 박순영기자] 연극을 보고나서 그 원작을 읽고 싶게 만든 연극이라면 정말로 성공한 연극 아니겠는가.
11월 2일부터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연극 ‘단테의 신곡‘은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100편이나 되는 시 ‘신곡’의 방대한 양을 연극, 창, 무용, 오페라, 영상 등이 결합된 130분짜리 총체극으로 압축해 보여주며 감탄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2013-2014 국립레퍼토리시즌 세 번째 작품인 이번 무대는 국립극장이 국내 처음으로 단테의 ‘신곡’을 무대화한 만큼 연출가 한태숙(63)과 작가 고연옥(42)은 원전의 내용에 대한 충실성과 보편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난해 1월에 사전제작에 착수해 8차례에 걸친 대본수정, 원작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토론, 남산 국립극장에서 3개월간 자정무렵까지 ‘지옥 같은’ 연습과정 등 연출, 작가, 배우, 각 스텝 등이 각고의 노력으로 무대가 이루어졌다.
11월 2일 첫 무대는 전석매진 되어 관객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삶에 대해 찾아 헤매는 '단테'가 숲속에서 마주친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연인 '베아트리체'를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지옥과 연옥, 천국을 각각 1주간 순례하는 내용을 전체 공연시간 2시간 10분 중 지옥이 1시간 20분, 연옥과 천국이 50분으로 지옥에 비중이 더 높게 그려졌다.
무대가 시작되면 주인공 단테가 승냥이떼의 가운데 둘러싸여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라며 ‘신곡’의 시 첫 구절을 외친다. 승냥이의 짐승 같은 동작들을 배우들이 근육의 움직임까지도 잘 표현하고 있었으며, 지옥불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느낌에 압도된다.
국립창극단과 함께하니 서양의 고전을 우리 것과 잘 섞어서 더욱 품격을 나타냈다. 현대음악과 한국의 창(작곡 및 음악감독 홍정욱)이 만나 지옥의 고통스럽고 무서운 느낌을 잘 뽑아낼 수 있었다. 지옥의 판관 ‘미노스’(김금미, 국립창극단 단원)와 뱃사공 ‘카론’(이시웅, 국립창극단 단원)이 부르는 창은 뼛속까지 엄습해오는 고통과 헤어날 길 없는 지옥의 먼 여정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단테 역의 지현준이 지옥, 연옥, 천국에 따라 깨달음을 얻으면서 목소리 발성이 바뀌는 데 반해 안내자 베르길리우스 역의 정동환은 항상 고요하고 낭랑하고 중립적인 것이 인상적이다. 단테는 지옥의 마지막 즈음에는 고통이 최대에 달한 것을 특히 찢어져가는 굵은 목소리로 표현한다.
2막 연옥의 거대한 경사를 표현한 언덕은 그것을 오르면서 고통 받는 이들의 제각각의 삶들을 이야기한다. 원로배우 박정자는 이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연출에게 먼저 “창녀같은 역할”없냐며 프로포즈해서 프란체스카 역을 맡았다. 짧은 출연인데도 역시 대배우의 카리스마로 남편의 동생과 애욕에 휩싸였던 죄를 씻고자 하는 역할을 잘 표현했다.
▲ 3막 '천국'. 45도 경사 계단에서 단테(지현준)는 베아트리체(정은혜)를 만난 기쁨을 표현한다.
3막 천국에서는 마침내 베아트리체를 만나 단테와 두 사람이 다양한 각도로 몸을 비틀며 지옥과 연옥을 지나 비로소 만난 기쁨을 표현한다. 원작에서는 베아트리체가 천국에서만 등장하는데, 이 연극에서는 지옥과 연옥에서도 계속적으로 등장해 단테의 운명을 이끄는 연인으로서 표현되며 비중이 높다.
또한 원작은 지옥과 연옥, 천국의 분량이 똑같은데 이번 연극은 천국은 아주 짧고 그 다음이 연옥, 지옥이 가장 비중이 높았다. 원작의 ‘천국’편에 있는 종교적 색채를 덜어냈으며, 우리 현실 삶의 고통이 지옥의 한가운데와 비슷하다는 의미로 각색한 것인데, 그것이 적합했다. 사실 천국을 극으로 길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재미도 덜할 것이다. 지옥과 연옥의 고통, 두려움의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연극적으로 오히려 수월하고 메시지 전달 부분이기 때문이다.
2시간여의 공연 후 작품의 번역을 한 박상진(부산외대 교수)의 사회로 두 주인공 지현준, 정은혜와 함께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늦은 밤인데도 자리에 남아 각종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모습에서 국내 첫 공연되는 ‘단테의 신곡’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박상진은 “‘단테의 신곡’ 번역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지만 단테의 순례를 함께 가자는 마음으로 끝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를 바로 내 옆 배우들의 모습으로 보게 되니 너무 반갑다. 요새 ”그래비티(Gravity)“ 영화가 인기더라. 인간의 운명이 중력에 속박되는 것인데, 단테의 대단한 점은 그 중력을 거슬러 결국 천국으로 간 것이다”고 작품에 대한 벅찬 소감을 밝혔다.
지현준은 “단테는 천국의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얻었으면서도 결국 현세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나도 현실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이라도 감사히 먹고,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 하려고 하는 것, 이게 ’구원‘이 아닌가 한다“며 작품을 돌아보았다. 정은혜(국립창극단 단원)는 “멀리 여신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연인을 어루만지듯, 단테를 어루만져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기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구원일 것이다”고 답했다.
고전은 그 지혜와 깊이로 시공을 초월해 적용되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작품은 자꾸만 연극, 영화, 뮤지컬 등 여러 형태로 거듭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읽혀진다. 어려운 작품에 담긴 의미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준 것, 그 위대함으로 안내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내용도 잘 꾸며진 연극이었다. 작품에 붙여진 ‘국가 브랜드’나 ‘총체극’이라는 수식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건 그 내용이다.
mazla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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