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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발렌티나 리시차 베토벤 리사이틀 '격정과 환희', 마스크로 서울을 울리다!

클래식

by 이화미디어 2020. 3. 25.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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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가 지난 3월 2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마스크를 끼고 연주하고 있다. ⓒ 오푸스


그녀도 왔고 나도 왔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

그녀도 썼고 우리 모두가 썼다.
마스크.

베토벤의 F minor는
진정한 medicine.



'건반위의 검투사' 리시차는 내게 오히려 엘리제였다. 베토벤의 초기, 중기 ,말기 소나타인 '폭풍', '열정', '함머클라이버'까지 리시차의 이번 연주를 들으면서 소나타, 베토벤, 그리고 리시차에 대해 내린 내 결론이다.

리시차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과 코로나라는 현 시국에서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정과 선물을 했다. 바로 예정대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회를 펼치며, 베토벤소나타 세 곡과 앵콜만 무려 다섯곡으로 두시간 사십분동안 코로나 대위기와 주변의 걱정, 눈총을 뚫고 온 관객들에게 '특종 선물세트'를 선사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활동중인 작곡가 류재준이 최고의 연주자를 소개하는 OPUS 마스터즈 시리즈 일환으로 지난 3월 22일 오후5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발렌티나 리시차 베토벤 리사이틀 - 격정과 환희'는 코로나로 인한 대다수 현장공연 취소로 목말랐던 클래식 관객들에게는 영혼을 적시는 단물이자 치유제였다.

예술의전당 2200석에 900여석 정도의 관객수는 확실히 코로나 시국의 움츠린 마음을 대변했지만, 덕분에 2m씩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기에는 수월했다. 5시 공연시작종이 울렸고, 이내 박수와 환호소리가 들려와서 리시차를 보려고 무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차분한 검정 드레스는 좋은데, 금발의 리시차가 얼굴가득 흰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입장인사 정도겠지'. 이렇게 내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벌써 첫번째 프로그램인 베토벤 소나타 17번 D단조 '폭풍' 1악장 도입의 느린 분산화음이 시작되었다. 두음씩 같은 음을 디디며 빠르게 5도 아래로 하행하는 독특한 주제가 검투사의 마스크를 통해 전달되니 오늘의 이 분위기에 잠시 눈물이 났다.

공연전에 다니엘 바렌보임의 엄격하고도 엄중한 '폭풍' 연주영상을 봤던지라, 빠른 패시지까지 물결 흐르듯 편안하고 물기머금은 리시차의 페달링이 공연초반에 내겐 익숙하지 않았다. 객석 D열에 앉아서 연주자의 빠른 손놀림이 안 보이는 위치인데다, 표정으로 느낄 수 있는 연주의 맛이 마스크로 가려진 탓일 수도 있겠다.

 

▲ 리시차는 앵콜을 다섯곡이나 연주했고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 박순영

 

 

하지만, 연주가 계속되고 네 번째 앵콜 이후 내가 기립박수를 치기까지, 그리고 지금 이글을 쓰면서는 더더욱 이번 공연은 정말로 '귀중한' 공연이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템페스트' 1악장의 느린 분산화음과 빠른 하행음계 주제의 대조에서는 인생이 항상 대척점에서 맞딱뜨리는 운명을, 2악장의 잔잔하고 안정된 선율을 조우하면서는 오늘 공연여정이 상당히 길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3악장에 비로소 도래하니, 3연음부의 물레잣는 형태의 주제에서 빠른 격정인데도 그것을 다 감싸안은 편안함과 우아함에서 그녀의 내공이 느껴졌다. 역시나 마지막 음이 끝나자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객석에서는 첫 순서의 만족감을 환호성과 크나큰 박수로 드러냈다.

두번째 프로그램인 베토벤 소나타 23번 F단조 '열정'부터는 이날 공연주제인 '격정화 환희'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2악장의 차분하고 의젓한 선율부터는 베토벤의 음악에서 내가 이전에 일관되게 느꼈던 '운명'보다는 오히려 '삶'을 느껴지면서, 리시차가 엘리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초기작이자 소품인 '엘리제를 위하여'의 주제나 음형, 곡의 전개방식이 이후 베토벤 소나타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줄기구나! 순간 음악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여기 예술의전당에 모인 우리 모두가 느껴졌다. 이윽고 3악장의 휘몰아치는 폭풍이 끝나자 바로 브라보 갈채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공연 후반부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Bb장조 '함머클라비어'였다. 당시 피아노들이 현을 뜯는 류트(Leute) 방식이었다면, 19세기 초 등장한 함머클라비어(독일어로 Hammer(망치) Klavier(피아노))는 해머로 현을 때리는 방식이어서 이전 피아노보다 덩치도 크고 소리도 컸다. 오늘날 피아노의 전신이 되는 이 거대한 악기의 특징을 살려쓴 베토벤 말기의 대곡이라 매순간 피아니스트의 열손가락을 통한 화려한 3화음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날 공연전반부 두곡의 명료한 주제나 전개에 비해 워낙 화음울림도 크고 주제간 연결길이도 길기에 "이 곡을 어떻게 듣지?" 하다가 이번에는 논리관계를 따지기보다는 소리의 방향과 리시차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를 온전히 맡겼더니 빠른악장인 1악장과 2악장에서부터 계속되었던 3화음의 연결에서, 외성선율만 강조된 것이 아니라 내성까지도 충실하게 모든 손가락이 동등하게 눌려진 꽉찬 느낌이 났다. 그리고 리시차의 페달링으로 부드럽게만 느껴지던 그녀의 타건감이 비로소 예술의 전당 벽면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리시차의 페달링에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피아노 등장 당시 이 거대한 역학적 악기에 대한 베토벤의 감명을 너무나도 잘 살린 연주였다.

리시차를 통해 대곡을 만난 느낌은 한마디로 베토벤이, 리시차가 "친구야 친구야"라고 부르짖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끝없이 친구를 찾는 우애어린 베토벤의 마음이라는 것,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와도 같다는 것, 느린 3악장의 끝없는 음의 연결과 그것을 묵묵히 연주하는 모습에서 '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닿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 코로나 여파로 조금 한산해진 공연장 로비 가운데에
리시차의 음반을 구입하려 관객들이 줄을 서 있다. ⓒ 박순영


우리는 이날 왜 이 예술의전당에 모였는가? 함머클라비어 4악장이 시작하기 전에, 즉 3악장이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객석에서 흐느끼는 느낌은, 곧 알고보니 마스크로 온몸을 덮고 이 코로나 시국을 온몸으로 느끼고 숨죽이며 연주했던 리시차의 것이었다. 나도 순간 눈물로 코끝이 찡했다. 피아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고, 1분여 퇴장 후 다시 나와 "관객들 마음을 달빛으로 덮고 싶어요"라고 설명하고, 4악장 대신에 리시차의 트레이드마크인 베토벤 소나타 '월광' 부터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까지 무려 다섯곡의 앵콜이 이어졌다.

'월광' 1악장에서 셋잇단음표 위에 담대하고 뚜렷한 선율이 투명한 물위를 걷듯이 너무 분위기 있고 현혹되는 느낌에 '리시차는 혹시 마녀 아닐까?'하는 장난어린 마음도 들었다. 2악장의 우애, 3악장의 격정과 폭풍, 쇼팽 녹턴 20번의 명징한 주제선율과 때론 옥구슬 같고 때론 밸브폰 같은 아르페지오 선율, 리스트 헝가리 주제 랩소디 2번의 화려한 기교와 파워풀한 왼팔의 힘, 드뷔시 '밤의 가스파르'에서 밤하늘에 알알이 부서지는 별가루들, 진짜 마지막으로 기교어린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5번까지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는 이런거야"라고 자랑하는 소녀처럼 커튼콜을 반복할 때마다, 관객들은 우뢰와 같은 기립 박수와 환호로 대만족을 표시했다.

리시차도, 기획사 오푸스도 이 공연을 할까, 관객들도 나도 공연장에 갈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리시차가 이번 한국행을 결정할 때 "한국의 방역시스템을 믿기에" 결정했다고 했듯이, 관객들도 나도 음악을, 베토벤을, 리시차를, 한국을 믿기에 예술의 전당에 모였다. 오랜만에 지하철 타고 공연장에 가니 신바람이 났고, 지하철, 버스, 거리의 좀 조용하긴 하지만 여전한 모습에 기뻤다.

이렇게 유튜브 스타 피아니스트 리시차는 다른 모두가 유튜브 연주회를 할 때, 반대로 위기의 한복판에서 관객들을 직접 만났다. 역시 대스타의 과감한 선택과 쇼맨십은 음악으로 '언제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서울 예술의전당에 코로나로 많은 공연이 취소 또는 연기된 가운데, 5월 30일부터 6월 5일까지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로 예정된 서울국제음악제 봄음악회인 '에머슨 사중주단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연주'의 공연여부에도 귀추가 주목된다.

 

 mazlae@daum.net


(공식페이스북) http://facebook.com/news.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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