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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태의 회화, 경계를 넘어 경계를 열고, 차원을 열고, 세계를 여는, 3.29 (수) ~ 4.15 (토) ​장은선갤러리에서

전시

by 이화미디어 2023. 3. 2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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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태, 겹_Layers, 100x100cm, oil on canvas, 2022

[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이원태의 경계를 넘어 경계를 열고, 차원을 열고, 세계를 여는 회화 전시회다 3.29 (수) ~ 4.15 (토) ​장은선갤러리에서 열린다. 다음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의 담론이다.

 

작업에 대한 작가들의 착상은 실로 다양한 곳으로부터 온다. 우주와 자연, 일상과 사회, 역사와 일화, 사건과 사고, 가상과 실재, 도덕과 윤리, 태도와 관념, 수행과 이념, 우연과 필연, 욕망과 상상력, 유희와 놀이, 자기반성적 사유와 때로 미술사적 형식논리와 같이 그 출처는 삶의 질이 복잡한 만큼이나 다종다양하고 예술에 대한 정의가 무색한 만큼이나 종잡을 수가 없다.

생각하는 동물답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착상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웬 착상이냐고 하겠지만 작가들의 작업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경우에 따라선 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하는 관건에 해당하는 경우도 없지가 않다.

이원태의 작업에 대한 착상은 좀, 꽤나 이례적이다. 굳은살이 그것이다. 굳은살? 언젠가 작가는 발목 부위의 복숭아뼈(복사뼈)에서 떨어져 나온 굳은살을 본다. 굳은살이 잘 생기지 않는 부위지만,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반복 사용하면 모든 신체부위는 원칙적으로 굳은살이 생길 수 있다. 도통한 스님들이 한 자세로 수행에 정진한 결과 사리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부사리, 몸사리, 살사리라고나 할까.

여기서 굳은살은 처음부터 굳은살이 아니었다. 속살이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굳은살이 된 것이다. 그걸 보면서 작가는 그게 꼭 자기를 닮았고, 자신의 삶을 닮았고, 존재론적 상처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약한 존재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궁리하고 몸부림친 흔적이며,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부대낀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학적으론 단순한 죽은 세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속엔 말하자면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존재일반의 생리(생존본능?)가 담겨 있다고 본 것. 자기연민이고 존재일반에 대한 연민이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렇듯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온 껍질에서 착상되었고, 그 의미 그대로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된다.

작가의 작업이 몸에 대한 남다른 사유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에 연유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작가는 거칠고 질박한, 갈라지고 터진 부위가 비정형의 패턴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껍질에서 굳은살과의 유사성을 본다.

이원태, 겹_Layers, 46.0x38.5cm, oil on canvas, 2022

형태적인(아니면 질감상의) 유사성이며 특히 의미론적인 유사성을 본다. 이를테면 소나무 껍질이 처음부터 껍질은 아니었다. 속살이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껍질이 되었다. 그 꼴이 꼭 굳은살 그대로다.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속살이 굳은살이 된 것처럼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가 스스로 껍질이 된 것.

 

그렇게 나무껍질이 특히 소나무 껍질이 작가의 작업 속으로 들어온다. 처음에 작가는 나무껍질 그대로를 재현하는데, 그게 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린다고만 할 수도 그렇다고 만든다고만 할 수도 없다. 그리는 것도 만드는 것도 아닌, 어쩌면 그리기와 만들기가 혼재되면서 그리기와 만들기를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발상과 과정과 방법을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붓(그리고 때론 나이프?)을 이용해 투명 유리판 위에다가 나무껍질 모양으로 물감을 얇게 편다. 일종의 물감 막을 형성시키는 것인데, 그게 적당하게 굳으면 유리판으로부터 떼어내 캔버스에다 옮겨 붙인다(콜라주?). 그렇게 옮겨 붙이면서 막 위에 막을 쌓는다.

실제로 소나무 껍질을 보면 하나의 껍질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얇은 막이 층층이 중첩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나이테와는 또 다르게 시간의 켜를 쌓고, 보호막을 쌓고, 상처를 쌓는다고나 할까. 그렇게 중첩된 나무껍질 형상을 화면 속에 병치시켜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형상의 나무껍질을 이루도록 조형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단위구조를 반복 병치시켜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 속에 어우러지게 한 것인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자연인 까닭에 기계적인 반복구조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자연엔 심지어 반복구조를 취할 때조차 사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실제로 작가의 작업 역시 그렇다.

그리고 껍질을 강조할 요량으로 대비를 도입하는데, 대개는 그 속이 빨간 홍송 혹은 적송의 속살을 거친 껍질과 대비시킨다. 이렇게 해서, 이를테면 거친 나무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을 대비시키면서, 질감을 대비시키고 색감을 대비시키면서 겉과 속, 안과 밖이 대비되는 상황논리를 열어놓는다.

이원태, 겹_Layers , 90.9x72.7cm, oil on canvas, 2022

겉과 속 그리고 안과 밖이 대비되는 상황논리는 말하자면 비록 나무에 대한 관찰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이분법적인,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존재일반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유비적 표현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그 자체 주제의식이랄 수도 있는 상황논리는 재차 이중적이다. 이를테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자기 분열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존재조건을 유비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를 인정하는, 이를테면 여하한 경우에도 하나의 일의적인 의미로 한정되거나 환원되지는 않는 존재조건을 비유한다.

몸으로 치자면 속살도 몸이고 굳은살도 몸이다. 나무로 치자면 속살도 나무고 껍질도 나무다. 존재로 치자면 겉(페르소나 혹은 외면)도 존재고 속(아이덴티티 혹은 내면)도 존재다. 그렇게 몸에 대한 그리고 나무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 작가의 작업은 종래에는 존재의 이중성에 대한 인정과 연민 앞에 서게 만든다.

 

여기까지가 몸에 대한 그리고 나무에 대한 관찰에서 유래한 존재의 이중성을 예시해주는 경우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확장국면에 들어선다. 단순히 나무며 껍질을 매개로 겉과 속을 대비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보다 추상적인 경우로, 그 자체 자족적인 형식논리를 전개시키는 경우로 확장된다.

작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단위원소, 모나드, 단자가 반복 중첩되면서 이러저런 형태를 만드는 모듈구조를 취하고 있고, 이런 모듈구조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형태 변주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일종의 만든 혹은 제작된 오브제로 명명할 수 있는 단위원소를 화면에 병렬시켜 추상화면을 재구성하기도 하고, 무슨 모를 심듯 단위원소를 촘촘하게 세워 심어 추상적인 형태를 만든다.

무슨 피막 같기도 한 얇은 물감 막을 중첩시켜 만든 오브제를 재구성하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표면질감이 두드러져 보이는 화면을 구성하기도 하고, 형태가 화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일종의 저부조 형식의 화면을 구성하기도 한다(보통 닥종이를 이용한 저부조 형식의 작업은 봤지만, 작가의 경우는 좀 이례적인).

때로 돌출된 화면이 빛에 반응하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미묘하게 달라져 보이는 또 다른 감각경험(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을 예시해주기도 한다. 여기서 이러저런 형태를 구성하는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오브제 자체는 거칠고 질박한 나무껍질의 표면질감을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보기에 따라선 일일이 두드려 만든 단조처리한 철 조각의 표면질감을 떠올리게 한다.

질감이 강조되는 것도 그렇거니와 더욱이 저부조 형식의 작업이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형식적 성취를 예시해준다. 아마도 조각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때로 단위원소를 얼기설기 엮어서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화면을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구조가 느슨하기도 하고 촘촘하기도 한 다양한 표정의 화면을 연출한다. 단위원소와 단위원소 사이에 일종의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인데, 때로 상당부분의 공간을 비워내 허허로운 화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여기서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오브제 하나하나는 마치 먹그림에서의 필이며 선과도 같고, 더욱이 여백에 대한 공간 감각이 한국화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또 다른 이력을 떠올리게 만든다. 각각 한국화 베이스와 조각 베이스가 그 경계를 허물고 융합되면서 작가만의 독특한 회화적 아이덴티티로 정착되고 승화된 보기 드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는 D(dimensional) painting이라고 부른다. 차원회화? 차원을 여는 회화? 다중 혹은 다층차원회화? 아마도 어느 정도 이 모두를 함축적으로 의미할 것이다.

상호간 이질적인 차원이, 이를테면 회화적 평면과 조각적 입체, 추상적 형식논리와 형상적 재현논리,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겉과 속, 안과 밖과 같은 이분법적 개념과 현상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층위로 중첩된 회화, 경계를 넘어서 또 다른 경계며 차원을 여는 회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상호간 이질적인 차원들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된 존재의, 삶의 알레고리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시간과 세월이 만들어준 결과 겹이며, 켜켜이 내려앉은 지층과 주름이 존재의 흔적이며 상흔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존재론적인 그림이고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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