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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국립현대무용단 송년기획공연 - 춤이말하다 Cross Cut

무용

by 이화미디어 2013. 12. 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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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Cross Cut 공연 리허설 현장. 국립발레단 수석 발레리나 김지영 (사진=국립현대무용단, 사진가 최영모)


[공연예술비평가 강익모 프리뷰] 예술의 전당에서 펼쳐지는 여섯개의 춤이 말하는 철학과 삶-<춤이말하다>는 무척 보기힘든 장면들이 많다. 놓치면 다시 보기 힘든 장면들은 비단 공연기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극의 흐름과도 같은 무용수의 발화와 그와동시에 울려퍼지는 기묘한 사운드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데 있다.

자유소극장의 <춤이말하다>공연이  특별하고도 고결한 이유는 무용수의 목소리다. 무용수는 몸으로 말하지 목소리를 내지않는다. 그러나 이 무대에 오르는 6명(발레의 김지영과 김주원은 교차출연)의 무용수는 몸과 목소리가 동시에 진심과 진실을 전하려는 몸짓으로 교차되거나 번역될수 있다는 지점에 관객에게 공감을 호소한다.

쭈볏거리거나 어색함이란 없다. 오히려 관객이 어색해하다가 자연스럽고 진솔한 무용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몸짓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역설의 정확한 역효과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국립발레단장으로 취임한 강수진의 발을 본 적이 있다면 놀랄 것이다. 아주 기형적인 발이다. 그런데 그 발에서 아주 아름다운 독무가 나오고 그녀의 진실이 내비쳐진다면 온국민이 김연아의 훈련 상처투성이 발을 좋아하는 이유와 꼭 같아진다.

김지영의 경우는 그 어떤 발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토슈즈만 보일뿐이다. 그런데 그녀의 토슈즈가 그렇게 선정적일수가 없다. 그것은 목소리가 덧칠해진 발놀림이기 때문이다. 고대 동굴 속 제의의 성격을 지닌 발놀림과 손놀림 그리고 급기야 몸놀림은 발레로도 갈라지고 이제 구음과 짓음이 함께 표현하고 보조하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혹은 호흡만으로도 이미 몸짓은 연속되고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재미난 표현을 빌자면 개그콘서트 <댄수다>코너에서 막시무스와 모니카 조의 예를 들수 있다. 발레나 현대무용의 동작을 취하면서 세대의 공감을 얻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는 이유도 몸동작과 소리로 동조하거나 저항하는 이질성을 적절히 섞기 때문일것이다.

몸짓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인도의 카타칼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르트나튬(Bharatanatyam) 이 대표적으로  Bhava(표현)+Raga(음악)+Tala(리듬)+Natyam(춤)의 네 의미가 바로 <춤이말하다>의 형식이된다. 그렇게 바르트나튬에 천착하고 이해하다보면 이내 <춤이말하다>에 드러난 6개의 마당이 모두 이들 인도의 고대로부터 전래된 일곱개 무용 형식과 연관이 됨을 알수 있다.

발레의 특징을 고도의 발 리듬과 섬세한 표정연기로 취한 김지영은 처음듣는 발레리나의 목소리 위에 보이는 소녀성과 여성성의 매력을 잘 전달 해내고 있다. 곧 모헤니아땀 (Mohiniattam)과 같은 미혹하고 사랑의 감정을 유도하는 미혼 여성이 추는 춤을  일컫는 말과 꼭 닮는다. 사랑스러운 여성의 기교와 연성에 마치 음악의 선율처럼 부드럽고 감미롭게 이어가는 동작은 원래 께렐라의 전통의상을 입은 인도의 크리슈나무르티였으나 김지영은 그들로 화신하였다. 여성의 우아함과 부드러운 자태를 보여주는 모헤니아땀이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재현되고 현전화한 것이다.

"쉔네쉔네쉔네"와 "포인트"를 외치는 그녀의 나지막한 거친 숨소리도 부드러운 여성성의 신화가 되는 기이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녀를 돕는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남성 무용수 이선태는 온갖 남성들의 질투를 받는 인물이 되고 아도니스로 화하는 순간이다. 김지영의 훈련에 의한 무용수로의 몸은 나이가 들며 둔탁해지거나 민첩성에서 예전과 다를 바 있겠으나 그녀의 몸밖으로 배출되는 둔탁과 소극적 민첩에서 남은 생채기에는 고독의 둥지에 부는 바람처럼 경험과 철학의 연륜이 고인다.

▲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Cross Cut 공연 리허설 현장. 현대무용 이선태(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신장과 사지 전체를 이용하여 몸을 감싸는 춤을 장식하는 이선태의 무대는 바로 카탁이다. 카탁은 본래 ‘카타(katha)'라는 뜻의 '이야기꾼'을 지칭한다. 곧 춤꾼 이선태가  인도전통 타악기인 따블라와 발목에 달린 발구르기 방울 리듬과 박자대신에 탱고, 미소년의 빛나는 육체미, 스페니쉬 기타 등을 동원하여 연기자가 되고 직접 대사를 읊는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카탁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매력을 잘 표현하였다. 무용수가 잘생긴 것 보다는 똑똑한 부분이 관객에게 어필되고 오래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준 무대다.

그는 때로는 제사장이 된 듯 보이거나 아도니스, 혹은 큐피트, 햄릿의 캐릭처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스스로의 테크닉을 놓고 자신을 드러내려할 때 마다 소리는 크게 이질감을 노출하였고 무용수는 몸이 아닌 소리로 전달되어 몸에 대한 중력과 집착을 걷어내게 하는 특별한 장치를 불러왔다.

이런 부분에서 이 공연의 연출자와 기획자가 다시 궁금하여진다. 이는 필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민하지 않으면 기교와 철학을 묶을 수 없는 지점임을 확신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면 출연 무용수가 지칠 무렵이면 다음 춤꾼이 등장하는 여러가지 계기를 상황에 따라 절묘하게 스토리텔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이 국격을 높여줄수 있다면 바로 이런 대목들이다.

▲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Cross Cut 공연 리허설 현장. 스트릿댄스 디퍼(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이어 보이는 오디시에는 두개의 중첩 의미가있다. 양식화된 감정표현(Abhinaya), 상징적인 손의 동작 그리고 얼굴 표정 연기로 이야기의 줄거리와 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비보이 스트릿댄서 디퍼의 무대가 그렇다. 즉 장식적인 순수 몸의 움직임(Nritta)을 공간과 시간 안에 보이는 하나와 또 다른 비보이라는 디제잉과 래핑, 댄스배틀의 언더그라운드 상황을 무대로 불러온 대중성이 큰 춤의 무대다. 배틀이라는 전쟁의 상황을 춤으로 묘사하는 게임의 형식으로부터 현란한 기술과 대중적 호응을 결집시킬 줄 아는 솔직한 춤으로 송구영신의 겨울을 움츠리지 않고 가슴을 열게 만든다. 디퍼가 입은 옷 SINCE 96년은 혹 69년일수도 있고 상호 호환되어 기호가 한곳만을 지칭치 않는 다중의 기호로 쓰인다는 측면에서 무대 의상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는 무한대의 의미로 뫼비우스의 띠이자 춤과 무용, 그리고 몸과 사고의 연결성을 보이는것과 같다.

땅이 편평한 곳이면 어디든 구르고 재주 넘던 그들이 젓가락, 돌고래의 유영 모습이나 솟구침에서 인간의 몸을 자연으로 다시 되돌리려는 노력은 그들이 허공에 머무는 <일대종사>의 영화 속 단추와 같다. 그만큼 심오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태도인 철학의 현전이라할 것이다. 이어 디퍼와 스트릿 댄서 안지석은 비트의 음악과 카 체이서처럼 격렬한 시소와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Jam을 벌인다. 마치 이들의 춤은 스트리트 퍼니처가 거리를 조화롭게 하듯 형태와 동기가 다른 무대인가 하더니 어느새 동조의 형태를 띄고 드럼비트와 리듬이 곧 행복과 몰입을 위한 관광 행위와 호흡에 대한 깊이를 서서히 끌어올리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그리고 소리는 이어져 무술과 무용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렉처가 촌스럽지 않은 적시적 느낌을 가져온다.

▲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Cross Cut 공연 리허설 현장. 스트릿댄스 안지석(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그 렉처의 핵심은 무술은 가장 파괴적인 동선과 간단한 원리의 가장 고전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즉 무술과 무용의 접점에서 그는 작두를 타기도 하는데 춤꾼이 철학하는 사유의 언저리를 맴도는 몽유를 상징한다. 이런 무술의 권법이나 품세에서 표현되는 몰입과 무아지경은 쿠치뿌디의 판토마임, 손동작과 같은 효과를 떠올린다. 놋쇠같은 접시 테두리는 작두이며 인도 무용수들의 겹겹항아리는 우리의 접시나 컵, 기타의 오브제로 변천한다. 철학이 통하면 오브제와 악기는 더 생동감있게  연기와 춤, 이야기의 형태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때의 화려함은 무용수들의 훈련된 다이나믹한 동작들로 인디언들의 교감신화와 태권도, 불경, 랩 등이 혼재된 고차원적 도에 이른다.

결국 이 춤은 다음의 유희와 동심으로 이어져 래핑(웃음)을 동반한 무용수의 마음이 동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올바른 몸의 움직임도 수반된다. 이는 웜업을 위한것으로 예술의 단계와 춤의 단계가 다르지 않다. 두번을 지켜볼 때 에너지와 웜업이 넘쳐  무대선을 넘어 객석으로 퉁겨 들어올 정도로 힘이 넘쳤다. 토기들이 달구어져 온기를 오래 간직하듯 절제력을 잃은 무용수 김운태의 채상소고춤은 악사들의 자리까지 빼앗고 독무대를 차지하다 무대뒤로 팽창되기도 한다. 바로 마니푸리 (Manipuri)였다. 마니푸리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밀접하게 얽혀서 엮어진 것처럼 농악이라 격하시킨 일본인들이 이름붙인 이 춤은 들판에서만 행하던 춤의 영역을 넘쳐 우리의 풍류악과 신앙, 민족적 특성을 지닌 전통춤이다.

▲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Cross Cut 공연 리허설 현장. 한국전통무용 김운태 (사진=국립현대무용단, 사진가 최영모)


오방색채의 화려한 장식품과 의상, 경쾌하고 민첩한 발동작, 섬세하고 진지한 표정, 자연에서 얻은 환경 친화적 음악 그리고 시적인 운율을 규격화하고 체화되어 구음과 합창으로 구분하거나 같이 토하고 읊는 민간생활 그 자체이다. 김운태는 대지의 기운을 천천히 긁어모아 악사들의 악기로부터 끌어주던 소리를 자신의 신체에 착복된 상모와 소고, 구름쇠와 옷자락의 섬세한 떨림으로 변전시킨다. 사회적 문화적 의식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으로 신명과 즐거운 기운의 마음들이 동화되어 눈은 감았지만 상모는 틀림없이 도는 것처럼 규현과 외다리로 힘을 절제하는 기운의 춤이었다. 일루전이나 일링스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빚맞은 팽이가 같은 자리에서만 맴도는 단조로운 팽이를 쓰러뜨리고 먼곳으로 튕기듯 손오공의 머리띠 '금고아'의 긴고주와 송고주를 떠올리는 무용수이자 무용이다. 이 무용수는 리허설을 않는 "잘하면 살판이고 못하면 죽을판"이라는 매순간 직설과 진솔로 무언의 소리를 낸 소리(이치와 흰 무연)꾼이기도 하였다. 공연2주전 이 무대를 위하여 머리를 자른 연유는 고대의 제사처럼 입신과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통할 정도로 천하의 도를 깨치는 행위로 춤을 택한 그가보인 이번 무대에 대한 각오였다. 생의 운명조차 마주하게될 정도로 인간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즉흥의 마니푸리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을 김운태의 몸을 빌어 찾아온 것이다.

▲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Cross Cut 공연 리허설 현장. 현대무용 이나현(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카타칼리 (Kathakali), 말그대로 ‘이야기놀음’이란 뜻이다.

카타칼리는 힘찬 남성과 여성적 온유로  2분된다. 이나현은 이미 독일에서 서양의 춤이 갖는 공간과 움직임의 원리를 이번 작업에서 분장을 통한 기묘한 재현 없이 공간을 가르는 표정연기와 소리를 통한 익살과 낯설게하기, 화려한 의상과 소품대신 이색적 무용극으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그가 솔로에 이어 이선태와 같이 교감한 음양의 몸들이 합을 이룬 신비롭고 경이로운 조합은 사사로운 사회성을 넘은 원초적인 것이었다. 이나현의 즉흥은 습관화된 오류에서 벗어나려고 시도된 것들이다. 그것은  특별하고 진솔하기 위한 고집이며 자신감이었다.  

왜 관절을 불편하게 하며 일부러 절둑거리며 무릎관절로 원을 그리는가?  몸의 신체적 연결 고리들과 질서를 부수며 신체의 껍데기로부터 탈피된 그너머의 진솔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이글거리는 낯선 풍경을 주었다. 그것은 몸을 글처럼 쓰고자 하였고 이국어와 본토어의 이질성을 혼용하고싶은 용광로를 가슴과 심장에 안고 추어낸 낯선 뜨거움이다. 그 뜨거움은 관절의 사용범위와 스텝의 폭, 무용 동작간의 연결을 더 크게 갖고 가려는 그녀의 라캉적 주이상스(jouissance)로 보인다. 테크닉이 아닌 소리를 냄으로써 몸을 비우고 스스로 몸에게 질문을 던지는 진솔함을 관객에게 보이는 것이다.

▲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Cross Cut 공연 리허설 현장. 현대무용 이나현·이선태(사진=플레이뉴스 문성식기자)

 
언제든 훈육된 신체로부터 에너지 제로의 상태로 진공에 가까운 유영을 꾀한다는 것은 어느무용수와 같지 않은 상상에서 기인한다. 특히 그녀와 이선태가 같이 선을 보인 공간 파고들기와 렉싱턴은 서로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인간군상의 몸을 훔쳐보기(피핑 톰)로 겪는 즉흥과 교감으로 이번공연의 기획자와 안무가가 얻고자한 결론을 단박에 보여주는 세션이었다. 이처럼 춤은 진화하고 그를 통한 앙상블과 예술적 영역은 점차 커진다. 상대방에게 믿고 몸을 맡기는 신뢰는 예술과 무용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인데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둘의 합체는 이루어낼 수 있는 화학적, 정서적 실체감이 너무 많다. 혹시 우리안에 숨은 두 개체를 발견하여 신뢰를 캐보면 어떨까?

이번 여섯명의 무용수들은 즉흥을 통하여 새로운 춤의 요소와 실체를 경험한다. 이 하나의 콜라보레이션은 매일 무대위에서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동안 몸은 진부할지도 모른다. 왜나하면 그들은 말보다 몸이 더 정확한 무용수이니까.

강익모/공연예술비평가 
visualaddin@hanmail.net

(공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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